“500년 된 회화나무, 지역민의 화합 중심축이 되다”
1592년, 조선을 전란에 빠뜨린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. 왜군은 부산진, 다대포, 서생포를 동시에 공격하며 순식간에 남부 해안 일대를 점령했고, 곧 한양이 함락되었고 조선은 국가 의 존망이 흔들리는 위기에 처했다. 이때 나라를 구한 세 차례의 대승이 있었는데, 우리는 이를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 부른다.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,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, 권율 장군 의 행주대첩이 그것이다. 이들은 모두 수적 열세 속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승리로, 위기에 빠진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운 상징적 전투였다.
그러나 이 3대 대첩 사이에서 또 하나의 결정 적인 승리가 있었으니, 바로 금산에서 벌어진 이치대첩이다. 특히 이 전투는 한산대첩과 같은 7월 초에 벌어졌으며, 해상과 육상에서 동시에 조선이 승전의 깃발을 올린 역사적인 기간이었 다. 한양에 집결한 왜군 지휘부는 조선 전역을 장악하기 위한 회의를 열어 각 부대에 팔도 침 공 임무를 나누어 부여하였다.
그중 제6번대는 조선의 젖줄이라 불리는 전라 도, 곡창지대를 목표로 삼고 진군을 시작했다. 왜군 제6번대는 먼저 금산을 점령하여 진지 를 구축하고, 대둔산 자락을 넘어 전주로 향하 고자 했다. 그 길목에 위치한 이치는 금산과 전주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다. 이치를 내주면 전라도는 물론 조선의 군량 보급과 병력 충원에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.
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조선 조정은 권율을 전라도 도절제사로 임명해 방어를 맡겼다. 권율은 금산에서 전주로 이어지는 길목, 대둔 산 기슭의 이치에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진을 쳤다. 그는 이치 고개의 험준한 지형을 철저히 이용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, 적의 동선을 파악 한 후 기습과 매복 등 유기적인 전술을 펼쳤다.
1592년 7월, 약 만 오천여 명의 왜군이 이치 를 넘어 전주로 진격하려 하자, 권율은 이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. 전투는 하루 종일 이어 졌으며, 조선군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결사 항전하였다. 결국 조선군은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며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. 전주성과 호남 평야를 지켜내는 데 성공한 이치의 승리는 이후 조선이 장기 항전을 준비하고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 기반이 되었다.
이치대첩은 단지 전투의 승리에 그치지 않는 다. 조선은 이 승리를 통해 병력과 군량을 안정 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전라도 지역을 사수함으 로써, 흔들리던 국가의 중심을 다시 세울 수 있 었다.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나라를 구한 전환 점이 바로 이치대첩이었던 것이다. 그리고 이 대첩이 벌어진 ‘이치대첩지’는 오늘 날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일원에 위치하며, 산과 고개, 협곡이 어우러진 생생한 전쟁의 흔적 이 남은 현장이다. 이곳은 단지 역사적 전투의 장소를 넘어, 조선의 정신과 공동체의 희생정신 이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.